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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20. 20世 〉11. <부정공>무본재공휘기엽묘표(務本齋公諱麒燁墓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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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부정공>통정대부부호군공휘득엽묘갈명(通政大夫副護軍公諱得燁墓碣銘)
通政大夫副護軍公諱得燁墓碣銘 湖南之士趙鍾悳余之從遊也一日抱其王大人之狀造不佞曰願先生文以賁之於隧余誼不可固辭遂按其狀公諱得燁字義瞻高麗光祿大夫諱璋爲鼻祖至諱佺以子推恩受封于玉川至諱元吉號農隱與鄭圃隱諸賢定策立勳封玉川府院君子姓因貫焉是生諱瑜號虔谷生進文科副正見麗運訖八杜門洞守西山採薇之志再傳諱智崙蔭察訪四昆季友愛篤至扁亭以相好二傳而諱大春號三灘乙巳禍後不求聞達卜築于漾碧江上與河西玉峯諸賢同遊酬唱我伯氏淵齋先生讚述墓文歎美其行治諱懋蔭參奉諱晫宣敎郞諱時聖以孝蒙旌累傳而曰台望曰成夏曰元淳曰仁根公之高曾以下四世也曰新平宋俛仰後孫相文公之外王考也公以 純祖丁卯十月二十五日生自幼性氣溫和慈愛守分謹拙少無放過嘗就外傳學一日慨然歎曰家貧親老菽水屢空竭力養志是人子本分事遂躬行漁樵勤于耕牧而不恥鄙賤甚至空乏時則負米於外以供滋味常以愉色惋容克盡溫淸之節者所以事父母也宿齋沐而致誠敬所以奉祭祀也業耕讀而勉孝悌所以敎子孫也窮焉而不慕不義之貴貧焉而不羡不仁之富固守廉介者所以行己持心也寬平坦蕩不設畦畛於我物之間而知舊族戚感化悅服者所二接人處事也通政大夫龍驤衛副護軍者己丑之冬適因吏禮曹曹布聞朝家望九之慶由道臣狀薦所以蒙優老恩典也上皇甲午九月十四日考終壽八十八葬于昇平府住巖面大龜西麓先兆之左申坐原配淑夫人興德張氏廷翼女梱範順貞家道賴成先公十年甲申十月十三日歿墓遷祔生二男一女男長曰亨奎次曰昶奎女適士人昌寧曺秉哲曰鍾悳鍾浩鍾萬鍾玹張基顯妻坤之長房出也曰鍾協朴泰俊張基永安斗炯李石淳妻公之次房出也自餘曾玄不盡錄噫古之桐栢山有朝出耕夜歸讀而入厨具甘旨上堂問起居父母不戚戚妻子不咨咨者若趙公殆其人之儔也歟銘曰公有孝學之篤在家而敎成公有德義之孚處鄕而化行晩被天爵之渥迺是報施之明後之欲知公者視此幽阡之銘 恩津 宋秉珣 撰 통정대부부호군공휘득엽묘갈명(通政大夫副護軍公諱得燁墓碣銘) 호남(湖南) 선비 조종덕(趙鍾悳)은 나의 종류(從遊)이다。 어느 날 왕대인(王大人:할아버지를말함)의 행장(行狀)을 가지고 나를 찾아와 부탁 하기를、 『선생께서는 글을 지어 할아버지의 무덤길을 빛나게 해주십시요!』 한다。 나는 굳이 사양하지 못하고 그 행장(行狀)을 살피게 되었다。 공(公)의 휘는 득엽(得燁) 자(字)는 의첨(義瞻)이며、 고려 광록대부(高麗光祿大夫) 장(璋)이 시조(始祖)이다。 전(佺)은 아들의(推恩)으로 옥천군(玉川郡)을 받았으며 농은(農隱)이라 부르는 원길(元吉)은 정포은(鄭圃隱)과 같은 선비와 함께 공(功)을 세워 옥천부원군(玉川府院君)이 되었는데 자손들이 이를 관(貫)으로 하였다。 그의 아들 호(號)가 건곡(虔谷)인 유(瑜)는 생진문과(生進文科)에 급제하여 부정(副正) 벼슬을 하였으나、 고려(高麗)의 국운(國運)이 다 된것을 보고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서산채미의 뜻(西山採薇之志:伯夷와 叔齋가 首陽山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으면서 周나라를 섬기지 아니하고 한평생을 지냄)을 지켰으며、 두 대를 지나 지륜(智崙)은 음직(蔭職)으로 찰방(察訪)을 하였고 四형제 우애(友愛)가 돈독하여 정자에다、 상호(相好)로 현판하였다。 三대를 내려와 삼탄공(三灘公) 대춘(大春)은 을사화(乙巳禍)를 겪은 뒤로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양벽강(漾碧江)가에다 정자를 짓고 하서(河西) 옥봉(玉峯)과 같은 훌륭한 선비들과 함께 모여 서로 시(詩)를 지어주고 받으며 지냈는데 나의 형 연재선생(淵齋先生)은 묘문(墓文)을 지어 그의 행적을 찬양한바 있다。 무(懋)는 음직(蔭職)으로 참봉(參奉)을 지냈고 탁(晫)은 선교랑(宣敎郎) 벼슬을 하였으며 시성(時聖)은 효도하여 정려(旌閭)를 받았다。 몇 대를 지낸다음 태망(台望) 성하(成夏) 원순(元淳) 인근(仁根)은 공(公)의 고조(高祖) 증조(曾祖)이하 四세(四世)이며、 신평 송면앙(新平宋俛仰)의 후손 상문(相文)은 공(公)의 외조부이다。 공(公)은 순조정묘(純祖丁卯:一八○七)년 十월二十五일에 태어나 어렸을때부터 성품이 온화(溫和) 자애(慈愛)하고 분수를 지킬 줄 알아 조금도 방과(放過)하는 일이 없었다。 일찌기 스승을 찾아가 배우던 공(公)이 하루는 한숨을 쉬며 탄식 하기를、 『집은 가난하고 어버이 늙었는데 봉양마져 제대로 못하다니 힘을 다하여 부모의 뜻을 받드는 것이 사람의 자식된 본분(本分)이 아닌가!』 하고 마침내 고기잡이 나무하기、 농사일、 짐승 기르는 일을 몸소 하면서 더럽고 천한 경우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으며、 부모 봉양하기에 끼니가 궁핍할때는 밖에 나가 쌀을 빌어다가 맛있는 음식을 지어 드리는 등 언제나 기쁜 얼굴과 환한 모습으로 부모의 거처를 살핀것은 부모 섬긴 도리요 목욕 재계하여 성경(誠敬)을 다한것은 제사를 받드는 지성이며 밭갈고 글읽는 것을 직업으로 하여 효(孝)와 제(係)을 힘쓰게 한것은 자손을 가르킨 법도요。 곤궁(困窮)해도 옳치 않은 귀(貴)는 생각지 않으며 가난해도 인(仁)하지 않은 부(富)는 부러워 하지 아니하며 청렴한 지조를 지킨것은 몸소 행하고 마음가짐이며 매사에 너그럽고 평탄하여 사물과 나 사이에 한계를 두지 않는등 지구(知舊)와 족척(族戚)들을 감화열복(感化悦服)하게 하였으니 이는 공이 사람을 대접하고 일을 처리하는 아량이요。 통정대부(通政大夫) 용량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이다。 기축(己丑)년 겨울 때마침 이 예조(吏禮曹)에서 표고한 망구지경(望九之慶)으로 그지방 도신 장천(狀薦)에 의한것인데 이는 많은 나이에 은전(恩典)을 입은 바이다。 이리하여 고종갑오(高宗甲午)년 九월 十四일에 세상을 뜨니 공의 나이 八十八세였다。 묘는 승평(昇平)땅 주암(住岩) 대구(大龜) 서쪽기슭 선조(先兆)의 왼쪽 신좌(申坐)에 있다。 부인은 숙부인(淑夫人)으로 흥덕장씨(興德張氏) 정익(廷翼)의 딸인데 곤범(梱範)이 순정(順貞)하여 집안이 훨씬 나아졌다。 공(公)보다 十년 먼저인 갑신(甲申)十월十三일에 세상을 떳는데 그뒤에 묘를 옮겨 공과 합장 하였다。 二남一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형규(亨奎) 차남은 창규(昶奎)이며 딸은 창녕 조 병철(昌寧曺秉哲)에게 출가 했다。 종덕(鍾悳) 종호(鍾浩) 종만(鍾萬) 종현(鍾玹)과 장기현(張基顯) 처(妻)는 큰아들 손자이고 종협(鍾協)과 박태준(朴泰俊) 장기영(張基永) 안두형(安斗炯) 이석순(李石淳)등의 처는 작은 아들 손자이다。 나머지 증、 현손(曾玄孫)은 다 쓰지 않는다。 아! 옛날、 『동백산(桐栢山)에 아침에 나가 밭갈고 밤에 돌아와 글을 읽으면서、 한편으로는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가지고 부모 침소에가 부모의 기거(起居)를 살피므로、 부모가 근심하지 않고 처자(妻子)가 탄식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고 하는데 조공(趙公)과 같은 사람은 실로 그 사람과 짝이 될만하다。 명(銘)에 쓰기를、 공이 간직한 효、 학(孝學)의 돈독함에 온 집안은 가르침을 받았고 公有孝學之篤在家而敎成 공이 간직한 덕、 의(德義)의 믿음으로 온 고을은 감화 되었네 公有德義之孚處鄕而化行 나이 들어 두터운 임금의 은혜를 입으니、 晩被天爵之渥 이것이 보시(報施)의 밝음 이로세 迺是報施之明 뒷날 공(公)을 알려고、 하는이 있거든 後之欲知公者 이 깊숙한 무덤의 새겨논 글을 보오! 視此幽阡之銘 은진(恩津) 송병순(宋秉珣)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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